길드다
세 개의 테마 : 청년, 공부, 그리고 자립

언제부터인가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면 기다렸다는 듯 질문이 날아온다. “우선 길드다를 소개해주시겠어요?” 길드다가 만들어진지 올해로 2년, 그리 길다고는 할 수 없는 기간임에도 이미 꽤나 많이 받은 질문이다. 그에 대한 공식적인 대답도 정해져 있다. “생소하시겠지만, 저희 길드다는 청년 - 인문 - 스타트업입니다…….” 청년 인문 스타트업 길드다. 비록 멤버들의 평가는 조금씩 다르다 해도, 현재는 이것이 길드다가 자신을 소개하는 방식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이미 맞은편에 앉은 사람은 대체 무슨 소릴하느냐는 표정을 짓고 있고, 그 의심이 깊어지기 전에 차근차근 풀이를 해주어야 한다. ‘청년’은 활동의 주체인 우리들이다. ‘인문’은 인문학, 즉 우리의 핵심 콘텐츠인 인문학-공부이다. ‘스타트업’은 이 활동의 정체와 의의, 즉 길드다 활동이 취미 따위가 아니라 진지한 ‘일’, 자립을 목표로 하는 ‘일’임을 의미한다. 고로 길드다는 ‘공부를 통하여 자립하고자 하는 청년들’이다. 이 짧은 설명은 꽤나 명쾌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라 이것만으로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상쾌해진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아주 잠시 뿐이다. 곧 그들의 얼굴에는 새로운 호기심들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다시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청년’, ‘공부’, ‘자립’이라는 단어는 일견 그 의미가 분명해보이지만 그것들이 모여 하나의 배치를 구성하게 되면 수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무엇입니까? 왜 그것입니까? 어째서입니까? 어떻게 합니까? 실제로 가능합니까? 이 질문들은 외부로부터만 오는 것은 아니며, 청년-공부-자립의 배치를 갖는 팀이라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이다. 때문에 길드다는 이번 비학술적 학술제의 기조 발제로서 이 세 가지 키워드에 대한 길드다의 고민과 그에서 비롯하는 질문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이어질 다양한 대답들을 경청하고, 또 의견을 나누고자 한다.

첫 번째 테마, 청년 : “저, 청년 활동합니다.”

우리는 여러 자리에서 우리 스스로를 ‘청년靑年’이라고 소개한다. “청년 인문학 단체”, “청년 페어”, “청년 캠프”, “청년 목수”…. 이때 ‘청년’은 물론 이-삼십대의 또래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표현하기 위한 적절한 단어다. 하지만 사회적 의미망 속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그러한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청년’이라는 단어는 조금 더 복잡한 고유의 맥락을 가지고 있다. 먼저 가까운 맥락을 살펴보자면, 2010년을 전후로 하여 우리 사회에서 청년을 향해 쏟아진 담론들이 있다. 『88만원 세대』로 대표되는 청년들의 암울한 사회·경제적 상황, 『아프니까 청춘이다』로 대변되는 청춘, 혹은 청년을 규정하는 목소리들. 이러한 목소리들은 청년을 일종의 마이너리티―보호되어야 할 사회적 약자로 규정한다. 동시에 여기엔 어떤 요구의 목소리도 있다. 이는 ‘청년’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역사적 맥락과 관련된다. 동아시아 한자권 문화에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신新청년’은 민족국가의 위기와 근대국민국가의 탄생에 앞서, 그것의 주체―‘국민’이 되고자 한 젊고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늙고 병든 세상에 맞선 새롭고, 개혁적인 근대적 주체들! 또한 20세기 후반 소위 386, 혹은 486이라 불리는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 역시 청년, 혹은 대학생으로서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이 되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오늘날 청년들에게 그와 같은 능동성, 패기―짱돌을 들어라!―가 요구되는 것이다. 청년은 이처럼 이중적으로 호명된다. 그러나 오늘날 시대적 흐름 속에서 ‘청년’은 우리가 보기에 오히려 근대국가의 위기 앞에, 이른바 ‘4차 산업혁명’, 혹은 전 세계적 네트워크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속에서 우리가 문제를 느끼고 변화를 요구하는 대상은 전前근대적국가, 혹은 거대권력이기보다 탈-국가적이고 미시적인, 일상적 차원의 문제들이다. 예컨대 여성주의, 동물권… 이런 운동들은 필연적으로 권리회복 운동을 넘어, 탈-인간주의를 예비한다. 우리는 매번 “어디까지가 여성이지?”, “어디까지가 동물이지?”라는 질문에 부딪히게 되기 때문이다. 이때 ‘청년’이라는, 이중적 호명이 요구하는 근대적 주체성은 사실상 무너진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적 권리를 주장하는 것을 넘어설 때, 우리는 당연히 권리투쟁의 주체인 국민, 혹은 시민이기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국가를 향한 열망, 민주화의 열망이 있어야 할 ‘청년’이라는 호명 아래 청년은 무기력한 이름이다. 또한 선재하는 사회적 차원의 담론 속에서는 분석하여 보듬어 주어야 할 대상이다. 그러나 보다 발생적인 차원에서는 그러한 당위 아래 포착되지 않는 수많은 움직임들을 이미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반문해야한다. 우리가 ‘청년’인가? 사회적 약자도, 짱돌을 드는 주체도 이런 우리의 상황과 요구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면, ‘청년’은 여전히 유의미한 범주인가? 아마도 한 가지 점에서는, 여전히 ‘청년’이라는 단어가 유효할 수 있다. 기존의 ‘청년’이 가진 역사적 맥락과는 다르지만, 우리 역시 우리 세대가 공유하는 우리만의 특정한 사회적 맥락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엄밀히 말해 우리의 할아버지 세대와 엄마 세대의 ‘청년’ 또한 동일한 의미로써의 ‘청년’을 공유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우리 또한 청년을 우리 나름의 전유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일종의 합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상황과 요구를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공유하고 있는가. 그게 아니라면, 우리는 보다 불특정한, 아직까지 정의되지 않은, 새로운 개념을 발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마도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 불리느냐는 것보다는, 우리가 우리의 시대에 당면한 문제적 상황들에 대하여 합의하는 과정일 것이다.

두 번째 테마, 공부 : “저, 공부하는데요.”

‘공부’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꽤나 친숙한 단어이지만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구체적인 의미는 조금씩 달라진다. 특히 특정한 상황에서 ‘요즘 뭘 하냐’는 질문을 받고 ‘공부한다’는 대답을 했을 때 그 차이는 직접적인 말로 혹은 희미한 뉘앙스로 돌아온다. 예를 들어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공부한다고 대답했을 때는 종종 ‘아직도?’ 혹은 ‘얼마나 남았니?’와 같은 반응에 맞닥뜨리게 된다. 이때 공부라는 행위는 가시적이고 명확한 목적을 위한 지식의 축적을 의미한다. 주로 졸업장, 학위, 자격증 등 사회적 증명이 목적에 해당하며 공부는 그 증명의 취득을 위한 과정으로 파악된다.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건 공부 그 자체라기보다는 증명의 취득 여부이다. 한편 문화공모사업의 면접에서 ‘공부’라는 단어를 꺼냈을 때는, ‘충분하겠어요?’ 하는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청년들을 모으는데 공부가 충분한 요인이 되겠어요?’, ‘공부라는 주제로 지역민들에게 어필할 수 있을까요?’ 이때 공부는 여가, 교양이라 불리는 문화적 자본의 향유의 선상에 있다. 따라서 여기서 공부는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나 레저 프로그램 등과 경쟁한다. 마지막으로 공부는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층위에서 삶의 변화를 촉발하기 돌파구를 모색하는 행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자신의 가치관, 삶에 대한 태도, 삶을 영위하는 방식, 그러한 지점들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여겨지는 것이다. 물론 상술한 세 개의 맥락은 대개 어느 정도 중첩되어 쓰인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저 세 맥락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경향을 포착하는 것이다. 첫째, 세 맥락 모두에서 공부는 어떤 ‘역량의 향상’을 의미한다. 둘째, 그 ‘역량의 향상’은 현재의 가장 구체적인 삶의 조건들을 구축하는 일과는 다소 유리되어 있다. 즉 - ‘공부’는 ‘일’이 될 수 없다. 공부는 ‘일’을 하기 위한 이전단계 - 준비과정이거나, ‘일’ 바깥의 영역에서 자신을 풍요롭게 하는 행위이거나, ‘일’과는 별개로 미래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한 시도이다. 이 정의들 속에서 공부는 자연스레 ‘일’과 관련된 요소들과 조금씩 거리를 둔다. 가령 ‘돈’, ‘신체성’, ‘실무’ (일상을 지속하기 위한 다양한 행위들). 이 거리감은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공부’조차도 현재의 삶을 외면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공부를 통해 접하는 내용과 내 현재 삶의 내용 사이에 괴리감을 심고, 결국에는 고뇌 끝에 둘 중 하나를 저버리게 한다. 자본주의의 폐해를 공부하면서도 돈을 벌지 않을 수는 없다. 텍스트를 통해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효과를 논하는 것과 실제 식사, 청소, 회계 관리를 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층위이다. 누군가가 그 간극에 대해 질문했을 때 공부하는 자의 언어는 때때로 궁색해진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모순이다. 공부를 역량의 향상을 도모하는 행위라 할 때, 그는 궁극적으로 삶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행위일 것이기 때문이다. 삶의 역량이란 당연히 관념적인 층위 뿐 아니라 실제적인 층위를 아울러야 하며, 따라서 ‘일’을 외면하는 공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미 닳고 닳은 레토릭처럼, ‘앎은 삶과 함께 가야 한다.’ 그렇다면, 삶의 역량을 향상시키는 행위는 어떻게 가능한가? 어떻게 두 개의 층위를 아우를 수 있는가? 아니, 두 층위의 경계와 상관없이, 삶의 변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공부-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는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하여 논하고 답해야 한다.

세 번째 테마, 자립 : 자립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래서 자립은 언제 할 건데?” 20~30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질문이다. 안정적으로 생활(이를테면 정규직)을 영위하지도, 그렇다고 새로운 영역(이를테면 벤처기업)을 개척하지도 못하고 있는 이 시대의 소위 청년은 자립하기에 언제나 ‘부족한’ 존재로 여겨진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는 청년의 자립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기성세대가 사회적 부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에 청년들은 반드시 사회적 차원에서 부를 재분배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청년들의 의지나 노력만을 문제시하는 전자와 다르게, 후자의 구조적 문제제기는 사회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면에서 전자와 후자는 비슷한 맥락을 전제로 두고 있다. 두 입장 모두 자립을 ‘개인의 경제적인 독립’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전제에 따르면 이 자리에 모인 여섯 팀 중 자립이 가능한 팀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한 ‘개인’이 존재할 뿐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이 판단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이 전제는 매우 근대적인 발상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회사에서 돈을 벌고, 아무 연고 없는 오피스텔에 살며, 홀로 문화생활을 향유해야만 비로소 ‘자립’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어떤 도움도 받지 않으며 잘 살 수 있는 존재가 있던가? 오히려 자립은 혼자서 경제적으로 서는 문제가 아니라, 관계를 새롭게 배치하는 문제에 가깝다. 청년이 자립한다는 것은 다른 청장년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어떻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물론 자본주의사회에서 경제적인 부분은 새로운 배치의 지표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이것으로만 자립여부를 단언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근대의 전제에 갇히지 않고, 우리가 처해있는 몇 가지 상황을 살펴봄으로써 자립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우리가 지원 받는 기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길드다는 문탁 네트워크의 ‘길위기금’으로부터, 규문은 ‘글로벌펀드’로부터, 강학원은 ‘청년펀드’로부터 지원을 받는다. 이를테면 2019년 길드다는 리모델링 공사비의 상당부분을 길위기금에서 지원받았고, 또 세 달간 다섯 명이 기본소득 명목으로 길위기금에서 원고료를 받았다. 물론 기본소득이나 공사비의 실지급액이 사회적인 기준에 한참 모자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단체운영과 개인생활 영역에서 기금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혹자는 우리가 기금을 지원받고 있기 때문에 자립하지 못하노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는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길드다는 단 한 번도 개인 혹은 개별 독립자로 섰던 적이 없다. 길드다는 여섯 멤버 개개인이 대단한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 아니라, 여섯이 이렇게 저렇게 합을 맞췄을 때 생기는 독특한 호흡 덕분에 굴러간다. 뿐만 아니라 길드다는 언제나 많은 친구들과 함께였다. 2019 청년페어만 보더라도 그렇다. <공산품 프로젝트>를 함께 했던 친구들이 없었다면, <비학술적 학술제>에 동참한 친구들이 없었다면 청년페어는 열릴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나 이외의 존재들에게 의존하며 활동하는데, 혹자는 우리에게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노라 말한다. 지원을 받고 다른 존재에 의존하는 것은 자립하지 못한 것을 반증하는 것일까? 만일 지원과 의존으로 자립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그로 인해 자립할 수 있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 혹은 새로운 배치를 통해 가능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