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
허영자의 지속가능한 공부

1. 공부의 발목을 잡는 허영심

올해 초 나는 자퇴를 했다. 이미 휴학을 하고 혜화동의 연구실에 나오고 있어서 별다른 미련 없이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는 환경공학이라는 전공에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지만, 그 외에도 사무직 알바를 하며 보았던 회사원들의 다소 광기어린(?) 표정, 연구실을 드나들면서 갖게 된 ‘먹고사는 일’에 대한 다른 이미지, 공부에서 느껴지는 재미 등 여러 가지 동기가 함께 작동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일 년 전까지만 해도 그 가치를 의심해본 적 없었던 대학 졸업장이 쓸모없는 종잇조각처럼 보였다. 그간 연구실과 대학에 각각 한 발씩 걸친 채로 지냈었는데, 이제는 규문 공부에 중심을 둘 수 있게 되었으니 나름대로 진일보 한 것 아닌가 하며 홀로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는 원래 하고 있던 세미나를 열심히 하고, 쓰던 글을 잘 쓰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뭐 그렇게 화려하진 않지만, 멍청히 남들 따라가는 일은 그만두었으니 이것도 자립이라면 자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문제는 그 공부라는 것이 맘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올해 내내 나는 허덕허덕 힘에 부친 채 공부를 해왔다. 세미나 준비는 전날에 닥쳐서 하다가 밤을 새우기 일쑤였고, 매달 쓰기로 한 연재 글은 매번 지연되고 몇 편 쓰지도 못했다. 나는 늘 시간에 떠밀리고, 늘 미진함을 느끼면서 아등바등 공부를 하고 있었다. 특히 약속된 시간까지 써야할 글을 못 쓰고 있을 때면 가슴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시간이 늦어 자리에 누워도 심장이 뛰고 얼굴에 열이 뻗쳐서 잠도 오지 않는 상태가 된다. 그럴 때면 머릿속은 온갖 걱정으로 들끓고 허탈한 상태가 되어버린다. 대체 나는 공부를 하면서 왜 스스로를 소진시키고 있는 걸까? 심지어 이것은 내가 (자립을 떠올리며) 마음먹고 선택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도 공부를 편안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물론 배우고 있는 텍스트가 쉬운 것도 아니고, 시간적 여유가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한없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그 시간 내에 이해한 만큼을 쓰면 되는 일이다. 더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은 질문으로 남겨두고 다음 할 공부를 이어가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못한다는 것은 곧 내가 나 자신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실력만큼 쓰기’를 못한다는 것은 실력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근본적인 문제, 나의 고질적인 심리적 패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나의 오랜 습관, 허영심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허영심은 글자 그대로 ‘비어 있는데(虛) 빛나 보이고자(榮)하는 마음’이다. 니체는 그것을 “있는 대로 또는 인정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의미하고 싶어”(『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373절) 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언제나 다른 이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리고 칭찬과 비난에 매우 취약하다. 이 같은 허영심은 나에게 성실함으로 드러났다. 성실함은 나의 오랜 자랑이었다. 주어진 일을 최대한 ‘잘’ 해내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나에게 본성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교회나 학교, 군대, 심지어 알바 자리에서도 언제나 원하던 좋은 평가를 얻고 만족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허영심은 내가 무언가를 의욕하고 행동하는 데 주된 동력이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그것은 나의 발목을 잡았다. “허영심에 차 있는 사람은 탁월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탁월하다고 느끼기를 원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기만과 자기 계략의 수단을 거부하지 못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545절) 공부는 ‘탁월한 느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공부는 오직 자신의 생각 하나를 넘어가는 문제이고, 가지고 있었던 전제나 놓지 못하고 있는 집착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비교 대상도 척도도 없다. 있다면 이전의 자신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공부는 스스로 탁월해지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공부를 하면서 탁월해지기를 원하기보다는 나 자신이 탁월한 존재라는 느낌을 받고 싶어 했다. 그래서 매번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이렇게 써도 되는지, 더 멋진 말을 써야 하지 않을지 끊임없이 검열하고, 재고, 노심초사하면서 있지도 않은 평가를 스스로 만들어 내며 자신을 소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언제나 ‘있는 것보다 더 있어 보이려하는 열망’이 작동하고 있었다. 좋은 평가에 대한 집착과 나쁜 평가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분주한 움직임들. 니체는 이를 ‘자기기만과 자기 계략’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남들의 시선 속에서 추출한 평가들을 모아 ‘나’라는 상(象)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상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이런 저런 평가에 울고 웃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여전히 허영심을 가득 안은 채 마치 꼭두각시처럼 공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나는 칭찬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 나를 소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충만하게 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 이것은 내게 자립이라는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한 경제적 독립을 자립이라고 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처럼, 대학을 그만두고 공부하는 집단에 들어오는 것만으로 자립했다고 하는 것도 유치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혼자 돈을 버는 것이나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일이다. 그래서 꼭 이 허영의 메커니즘을 파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어떤 삶의 태도의 반영인지, 어떤 인식을 전제로 하고 있는지, 나아가 지금 나는 배우는 자로서 어떻게 자기 공부의 리듬을 만들어갈 수 있을지 니체의 도움을 받아 알아보고자 한다.

2. 허영, 그 빈곤함에 대하여

허영심이라는 말은 니체의 거의 모든 저작에 등장한다. 물론 니체가 허영심 일반을 비판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허영심이 없다면 인간의 정신은 얼마나 초라하겠는가!”(『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79절)라고 말하며, 그것이 우리 자신의 초라하고도 난폭한 ‘날것의 정신’을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이롭다고 한다. 사실 불완전한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로서 관계 맺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허영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니체가 허영심을 문제 삼는 지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허영심이 필연적으로 기만을, 그것도 자기기만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 우리는 상품을 진열해놓은 가게와 같은 것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타인들이 우리에게 귀속시키는 외관상의 특징들을 끊임없이 정돈하거나 숨기거나 드러낸다. 우리 자신을 속이기 위해.” (『아침놀』, 383절) 허영심이 강하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 즉 외부의 시선에 더욱 집착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자신을 ‘상품들의 진열대’로 만들어 놓고 타인들의 시선에 따라 끊임없이 편집한다. 그가 더 많은 손님을 상대하고 고려할수록 그는 더욱 부지런히 일한다. 그는 상품들과 가게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호하는 상품(특성)을 자신도 선호하고 싫어하는 상품을 자신도 싫어하게 된다. 그 결과는 무엇일까?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를 원하게 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89절) 그는 자신에게서 남들에게 팔릴만한 것들을 중시하게 되고 그것을 기준으로 모든 가치를 측정하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할 따름이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살고”(『아침놀』, 315절)있다. 즉 외부의 평가를 의식하고 갈망하고 그것에 민감하게 될수록 정작 자신의 취향과 고유한 즐거움은 점점 빈곤해진다. 최근 나는 나에게 아무런 취미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시간을 쪼개서 조금이라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라도 따로 보고 싶은 책이나 영화, 만나고 싶은 사람이 없었다. 여름에 잠깐 일주일 정도 연구실을 쉬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멀뚱멀뚱 집에 앉아 있었다. 당장 뭘 하고 싶은지, 평소 내가 뭘 즐거워했는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이와 비슷한 상태를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이나 대학교 방학 기간, 입대 전의 공백 기간 등 바쁘게 치러오던 평가의 굴레가 멈췄을 때, 나는 멍하니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 몰려오는 것은 무기력감이었다. 그래서 나는 곧바로 토익시험이나 한국어능력시험과 같은 것들을 떠올리곤 했다. 이같이 평가가 멈추는 동시에 의욕도 멈춰버리는 현상이 말해주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평가되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 즐거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내게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끊임없이 ‘인정받을 수 있는 일’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 일들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렇게 나의 성실함은 평가 바깥에 있는 영역에 대해서는 조금도 작동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평가 외 영역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지극한 불성실이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불성실은 역설적이게도 표면적 성실함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이를 활동적인 인간의 태만함을 들어 설명한다. “활동적인 사람들에게는 흔히 더 높은 활동이 결여되어 있다 : 여기서는 개인적인 활동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들로서 유적 존재로서는 활동적이지만 아주 특정한 한 개인, 유일무이한 인간으로서는 활동적이지 않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태만하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283절) 활동적인 인간은 위에서 나온 ‘상품들의 진열대’의 주인과 닮았다. 둘은 매우 부지런하고 성실하지만, 어디까지나 평가되는 ‘유적 존재’로서만 그러할 뿐이다. 마치 성실하게 시험을 준비하고 알바를 했던 내가 정작 좋아하는 소설책 한 권, 영화 한 편을 떠올릴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유일무이한 개인’으로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조금도 활동적이지 않고 오히려 태만하다. 니체는 이렇게 정리한다. 그들은 노예다. “왜냐하면 하루의 3분의 2를 자신을 위해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노예이기 때문이다.” 가장 분주하고 가장 성실히 일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위한 것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존재. 설령 그것을 즐거워한다 하더라도 그는 노예다. 정리해보자. 허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행위와 능력, 나아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측정하는 기준을 타인의 평가로부터 가져올 수밖에 없는 무능력이다. 허영심은 얼마든지 근면함이나 충실함과 같은 사회적인 덕으로 드러날 수도 있지만 그것은 특정한 상태의 결과와 같은 외부적 조건에 규정되고 있다는 점에서 어디까지나 수동적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확인받고자 하나, 그럴수록 스스로가 누구인지, 무엇을 왜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상태. 그것이 바로 허영의 역설이다. 그렇다면, 대체 허영심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다시 말해 어떤 인식의 전제 속에서 우리는 있는 것보다 더 있어보이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는 것일까?

3. 존재의 무구함과 칭찬과 비난의 무의미성

우선 나의 경험에서부터 살펴보자. 아주 어려서부터 나에게는 칭찬과 비난이 아주 크게 들렸다. 그것은 마치 나에 대한 판결인 것처럼 여겨졌고, 엄청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부지런히 내가 한 행동과 뱉은 말들에 반응을 살펴왔고, 그것들에 책임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하는 후회를 덧붙였다. 외부의 평가에 부여하는 권위와 자기 행위에 부여하는 가책. 여기에는 언제나 하고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했어야 하고, 할 수 있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다. 이것이 평가에 민감함, 곧 허영심 저 아래에 깔려있는 인식의 전제였다. 자유의지란, “의향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으로서 어떤 행동을 자의적으로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99절) 이때의 ‘자유’는 주변의 다른 모든 것들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원자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처럼 “무제약적이며 관련 없는 것”(같은 책, 18절)으로서의 독자적인 의지가 인간에게 내재해 있다고 보는 것이 자유의지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고 이같이 의지에 대한 자유가 전제될 때, 일어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는 자연 재해나 동물들에 대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책임을 지우거나 시비를 따지지 않는다.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것의 필연성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개개인, 특히 자기 자신의 행위와 감정에 대해 자유의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도덕적 심판을 가한다. 그러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런 방식으로 일어나지 않을 방도가 없는 것들이다. 어떤 것도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파생되며 서로 맞물려서 운동한다. “모든 것은 필연적이며, 모든 운동은 수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다. 인간의 행위도 마찬가지다.”(같은 책, 106절) 특히 어떤 인물의 행위에 대해서, 우리는 침착하게 몇 개의 인과와 전후 맥락만을 고려해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악당이나 범죄자가 주인공인 영화를 볼 때 그들의 폭력적 행동의 이면에 있는 단지 몇 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좋은 놈, 나쁜 놈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뇌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화학적 과정과 원소들의 싸움”(같은 책, 107절) 혹은 몸의 안팎을 통과하는 정밀한 기(氣)의 흐름까지 전부 따져 계산해 볼 수 있다면 세계에 설명 불가능한 행위나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사건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는 니체의 표현대로, “행위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착각하는 것, 즉 자유의지를 가정하는 것도 바로 이 계산되어야 할 메커니즘 속에 포함되어”(같은 책, 106절)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필연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유의지를 믿는 것 역시 필연성 속에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여전히 어떤 행위를 필연적인 것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그것은 우리의 모든 판단과 인식의 기초가 되는 감각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감각은 세계의 모든 운동을 지각할 수 없다. 오히려 아주 일부만을 지각할 수 있을 뿐이다. 니체는 우리의 감각을 감옥이라고 표현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감각의 “지평에 따라서 세계를 측정하면서, 이것은 가깝고 저것은 멀고, 이것은 크고 저것은 작고, 이것은 딱딱하고 저것은 부드럽다고” 판단하며 살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아침놀』, 117절) 이 같은 감각의 제한성, 즉 인식의 불가피한 오류는 우리가 개체로 존재하는 한 수반하게 되는 존재조건이다. 우리는 유한한 개체인 한 근본적으로 세계의 운동들의 극히 일부만을 이해할 수 있다.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필연적이지만 우리는 필연성을 지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코 행위의 무책임성을 이해할 수 없는 걸까? 결코 행위를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걸까? 니체는 감각 기관이 만들어내는 인식의 활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자신의 그물 안에 갇혀 있다. 우리들 거미는 이 그물 안에서 무엇을 붙잡든 바로 우리의 인식이 그물 안에 걸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잡을 수 없다.”(같은 책, 117절) 그런데 최소한 자신이 그물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래서 그물에 걸리는 것만을 잡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그물을 통과하는 것들이 있으며, 사실 걸리는 것 빼고 모든 것이 통과하고 있음을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 우리 감각 조건의 한계를 이해함으로부터 우리는 적어도 우리의 인식에 대한 믿음에 갇히지는 않을 수 있게 된다. 과학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도구다. “과학은 우리가 바보처럼 외관만 보고 모든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건에서 [복잡한 인과관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단순한 인과관계에 대한 믿음을 버리게 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6절) 어떤 사람의 이해할 수 없는 분노나 눈물도 의사의 눈에는 그 메커니즘이 훤히 보일 수 있다. 심리학자나 명리학자에게 보이는 것은 또 다를 것이며 우리는 그들의 해석을 통해 사건에 더 복잡한 원인들이 작동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더 많은 수의 관점들을 경험해 더 정확한 사실을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종류의 색안경을 써 보더라도 여전히 “실재”가 무엇이며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따지고 있다면 한 개의 안경을 가진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것이 어떤 관점이 되었건 개체 차원에서 구성한 것이며, 잘 해봐야 인간 차원에서 구성한 세계-해석이 아닌가? “거기에서 환상과 인간적인 첨가물을 제외”해보면 무엇이 남을까?(『즐거운 학문』, 57절) 중요한 것은 세계의 “실재” 모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점의 그물망이 세계를 특정한 색채와 모양으로 출현시킨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관점에 가만히 머무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머물렀던 자기의 관점과 세계가 너무나 협소했음을 발견하는 ‘자기 인식’은 언제나 새로운 사물과 사람, 생각들과 관계 맺기를 형성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진다. 사물들과의 기존의 관계를 떠나고 있을 때, 그럼으로써 다른 느낌을 구성하고 있을 때, 우리는 유한한 조건 속에서 인식하지만 그러한 인식이 엮어낸 그물이 행위를 둘러싼 세계의 단면만을 비출 뿐임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하다. 니체가 말하는 인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필연적인 것이 우리 개체의 차원에서는 우연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음에 대한 겸허한 이해. 이것은 행위의 인과관계를 모조리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어떤 조건 속에서 그 행위를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되는 이행의 과정이다. 즉 “방랑자가 어느 도시의 탑들이 얼마나 높은지를 알기 위해 그 도시를 떠나는 것과 같은 방식의 일”(같은 책, 380절)이다. 바로 그럴 때, 우리의 관점은 개체를 향해 닫히는 것이 아니라 필연성을 향해 열리게 된다. 그로부터 어떤 행위도 단일한 개인에 귀속될 수 없으며, 독자적이고 자의적인 의지의 산물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인식이 거기까지 이를 때, 어떤 행위도 자연처럼 무구한 것이 된다. “모든 것은 필연이다─라고 새로운 인식은 말한다 : 그리고 이 인식 자체도 필연이다. 모든 것은 죄가 없으며, 인식이란 무죄를 향한 통찰에 이르는 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7절) “인식하는 자가 삼켜야만 하는 가장 쓴 물약은, 인간이 자신의 행동과 본질에 대하여 완전히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 그는 더 이상 칭찬해서도 비난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과 필연성을 칭찬하고 비난하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7절) 니체는 칭찬이나 비난, 처벌과 보상과 같은 평가 기제가 단지 “격려의 의미 밖에는 가지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것들은 수단이다. 칭찬과 비난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많은 동기들 중 하나가 될 뿐이지 일어난 일에 대해 꼬리표처럼 붙어서 행위 자체에 자격이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칭찬과 보상, 비난과 처벌은 일어난 행위나 그 행위를 한 사람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행한 것 외에 달리 할 수가 없었던 것뿐”이기 때문이다.(같은 책, 105절) 그는 행위에 따라붙는 그러한 평가를 받을 자격도 책임도 갖지 못한다. 이미 그는 행위 자체로 목표점에 있는 사람이지 행위를 이리저리 조절하고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를 어떻게 바라볼까? 그는 자신의 행위가 독립적 의지가 아니라 자연 모든 것의 운동 속에서, 즉 필연성 속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의 해온 어떤 일에 대해서,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을 했을 뿐이며 결과가 어떤 것이든 간에 “나 그렇게 되기를 원했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36절)고 말할 것이다.

4. 주인으로서 배운다는 것

정리하자면, 허영에 깃들어 있는 것은 자유의지에 대한 인간의 환상인데, 그것은 아주 한정되고 협소한 관점에만 국한된 개체적 인식의 한계다. 그러나 우리는 제약된 인식으로부터도 행위 자체의 무구함과 필연성을 인식할 수 있다. 단,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계속해서 떠나는 방법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자유의지도 없는 마당에 어떻게 떠난단 말인가? 니체는 어떠한 행위도 그것을 둘러싼 힘들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그것은 외부의 힘이기도 하고 우리 내부의 힘들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기후, 습도, 온도, 식사량, 수면량, 노동량 등의 물리적·생리적 차원의 힘들뿐 아니라 법, 도덕관념, 과거의 경험, 주변 사람의 영향력, 사회적 유행 등의 심리적·관념적 차원의 힘들이 맞물린 가운데 일어난다. 우리 내부와 외부를 통과하는 힘들의 배치. 그것이 우리의 행위를 추동하고 욕망을 발생시키고 있다. 그 배치 속에서 우리 내부의 힘들, 즉 복수적인 충동들 중 일부가 특정한 방식으로 커지거나 작아진다. 가령, 내가 대학을 그만두고 공부를 하기로 한 결정 속에도 미묘한 것부터 거대한 것까지 수많은 충동들의 경합이 있었고 어떤 충동을 활성화하는 배치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평가를 의식하며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태도 역시 특정한 배치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 같은 배치를 바꿔봄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추동하는 힘들이 다르게 활성화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이 같이 배치를 변화시키는 시도가 자신에게 “양식(style)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새로운 힘들이 발휘되도록 생활 리듬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는 누군가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신을 방기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을 특정한 조건 속에 둠으로써 스스로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강제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마치 정원을 꾸미는 정원사가 수풀 구석구석 어디를 자를지, 어디를 내버려 둘지 결정하며 스타일을 완성해 가듯이(『아침놀』, 560절), 양식을 만드는 자 역시 자신이 어떤 부분을 정복하고 복종시켜야 할지 알고 있으며, 자신의 천성 전체에 지배력을 가한다. 니체가 평생 자기 자신에게 부여해온 양식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고기와 계란으로 이루어진 가벼운 식사”와 “며칠 동안의 조용한 산책, 적은 말수, 드물지만 신중한 독서, 혼자 거주함, 청결하고 질박하며 거의 군인 같은 생활 습관”(『아침놀』, 553절)이었다. 허름한 여인숙에 머물며 때가 되면 산책을 하고 매일매일 글을 쓰는 단조로운 일상. 그것은 누구도 강제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평가되지 않는 자기 철학을 위한 삶의 스타일이다. 이러한 양식을 유지함으로써 그는 그 어떤 명예나 가난, 심지어는 질병에게까지도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 수 있었다. 그 때문에 평생 니체를 괴롭힌 병조차 니체 자신에게 원한의 대상도 약점도 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사유의 동기이자 감사해야 할 적-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는 스스로 주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지금 나의 위치인 배우는 자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활동에 묵묵히 고독하고 결연하게 만족하는 불굴의 인간. 자신들이 극복해야 할 것을 모든 사물에서 찾으려는 내적인 성향을 지닌 인간. (···) 자기 방식의 축제일과 근무일과 애도일을 지니고 있고, 명령하는 일에 익숙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복종할 준비도 되어 있으며, 이런저런 일에 한결같이 긍지를 지니고 자신의 일에 복무하는 인간. 보다 많은 위험에 부딪히고,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행복한 인간!”(『즐거운 학문』, 283절) ‘준비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의 단편에서 니체는 주인으로 사는 사람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그에게는 어떤 사물도 사유의 대상이다. 그가 일상에서 만나는 텍스트, 사람, 사건은 그에게 언제나 스스로를 극복할 기회가 된다. 그는 무엇을 애도하고 기념할지 그리고 무엇에 봉사하고 무엇에 복종할지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 무엇이 스스로를 강하게 할지 철저하게 계산하고 시도하는 그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 대한 극도의 성실함이다. 그는 자신에게 강제력을 행사하지만 그것을 자기를 더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자기가 더 커지는 방식으로 행사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그가 복종할 무언가, 어떤 스승(그것이 텍스트건 사람이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스승 역시 자기 자신의 수련을 위한 한 과정이다. 이는 그리스인들의 배움과 닮았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을 지도해줄 스승을 찾아가 그의 밑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지도를 받는 목적은 단 한 가지, 자기가 자신을 온전히 지배하기 위해서, 즉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철학교사에게 복종한다면, 그것은 언젠가 자기가 자기 자신의 스승이 되기 위한 것”이다(미셀 푸코, 『안전, 영토, 인구』, 난장, 252쪽). 따라서 그들은 배우는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수련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공부와 일, 식사, 만나는 사람, 가는 장소 등에서 멍하니 하라는 일만 수행하는 것, 삶의 의무수행자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쩔쩔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 자기 자신의 성장, 스스로 강해지는 것이 최우선이 되는 생활일 것이다. ‘이런저런 일에 한결 같이 긍지를 지니고 자신의 일에 복무하는 인간’은 자신을 소진시키지 않는다. 그는 그가 겪는 ‘이런저런 일’을 스스로의 수련의 일환인 ‘자신의 일’로 삼고 그것에 복무하기 때문이다. 그의 긍지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 누구도 자기 자신보다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에 있다. 그는 외부의 의무를 이행하면서도 수동적이지 않다. 그 모든 일을 그는 자신을 위해 한다. 다시 말해 그는 배우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주인이 되어가면서 배운다. 바로 그렇게 배울 때, 그는 칭찬이나 비난을 관객들의 웅성거림 정도로 여기며 자신의 공부를 지속해나갈 것이다.

5. 나오며

기간으로 따져보면 고작 1년을 채웠다. 그런데 벌써 글이 안 써진다고, 공부가 지친다고 징징대는 것이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생각해보면 올해 초까지 내가 쓰던 글은 소소한 대학 일기였다. 그마저 문장도 엉망이고, 내용도 엉성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공부하는 텍스트에 걸맞은 수준의 문장을 써야 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러한 텍스트는 그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연구하고 쌓아온 철학과 사상을 풀어놓은 것인데 말이다. 그 내용을 완벽히 해석해서 유창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던 것이다. 머릿속에 있는 글쓰기의 이미지가 이렇게나 뚱뚱하니 나의 글은 계속해서 불만스러웠던 것이다. 나의 허영이 놓인 자리가 딱 여기였다. 그렇다면 나의 자립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할까? 지금의 나로서는 아무래도 넘어진 자리인 글쓰기가 다시 시작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사실 똑같은 문제를 또 마주치게 될 거라는 걱정이 든다. 또 시간을 못 지키고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패턴이 반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글쓰기에 등을 돌리고 담을 쌓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써보자. 잘 써지건 잘 안 써지건 그 글을 쓴다는 것이 나를 어떻게 달라지게 하는지를 우선 생각하자. 글쓰기와 함께 내가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에 집중하자. 글을 쓰는 일이 업무가 아니라 수련이 되게 하자. 누가 뭐라 해도 쓸 수 있는 말을, 부끄럽더라도 꾸준히 써보기. 그래서 글쓰기를 칭찬과 비난에 대한 나의 과민증을 치료하는 과정으로 삼아보고 싶다. “칭찬이나 비난에 무관심해지기 ; 이것이 그 처방이다. 그에 반해 우리의 목적이나 척도가 무엇인지 알며, 우리에게 중요한 칭찬이나 비난을 의미하는 어떤 집단을 스스로 정하기.”(『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11[1]) 아마 나에게 칭찬과 비난을 의식하지 않기란 수년, 수십 년이 걸려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다만, 거기에 반응하는 나를 미워하지는 말자. 그러나 니체가 제시하는 한 가지 처방은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이 우리에게 칭찬이고 비난인지 그 척도를 구성해낼 수 있다. 모든 사회와 개인은 각자의 선의 위계와 가치평가의 척도를 가지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척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7절) 이제 더 이상 나에게 학벌이 좋다거나 사회적 스펙이 높다는 것이 더 이상 칭찬으로 여겨지지 않듯이 새로운 척도, 새로운 칭찬이나 비난을 의미하는 가치 양식을 정해가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아는 그것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부인 것 같다.